'울티마 온라인'이라는 손대면 좀비가 된다는 무서운 게임의 전설이 있던 시절, 나와 몇 명의 당구프렌드들은 스타크래프트>디아블로>다크에이지오브카멜롯>월드오브워크래프트 라는 특이한 망트리를 탔다.

그중 나에게 각별한 병과 약을 선사했던 게 소위 다옥이라고 불리웠던 세 번째 게임인데, 그 안에서 사회성과 정치 시스템과 경제개념과 빈부양극화 등등을 빡세게 학습했다. 물론 이 얘기는 주변에 잘 안한다. 말그대로,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듣기에 게임폐인의 변명으로 들리기 딱 좋은데다, 똑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배우고 깨닫는 사람이 있는 반면 현실과 똑같이 살며 이용당하는 사람도 많아서 굳이 경험을 나눌 가치를 못느끼기 때문이다. (다옥 한국서버 초기 유저들은 Vengeance라는 재수없게 영어로 채팅을 하며 무려 '맵핵'을 써서 남들이 한달 걸릴 포인트-매출을 하룻밤에 쓸어담던 아주 못쓸 길드를 기억할 것이다. 억울한 게 있는 사람들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이때 잘 배웠다.)

(다옥은 대강 이런 느낌의 게임이다. 인터페이스가 완전 불친절)


검은 사막을 한번 해보긴 했는데, 우리 동네 PC방 사양이 딸려서 오래는 못했다; 경제시스템 부분을 제외하면 기술력이 딸려서 구현이 엉성한 게임은 아니다. 문제는 지금 게임을 하는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옥의 시스템을 지금 되돌아보면, 끔직하기 이를 데 없다. (일단 북미서버였다는 건 잠시 건너뛰고) 시작마을은 종족에 따라 3~4개로 갈리고, 모여서 시작하려면 종족별 직업제한 때문에 파티구성이 안되며, 일주일쯤 번 돈으로 장비를 한개 살까말까 하지만 중요한건 장비 성능이 엉망이라 돈만 날리기 십상이고, 레벨시스템이 깡패라 적정지역을 벗어나면 한방에 날 죽일 선공몹이 널려있었다. 게다가 한번 죽으면 경험치와 장비 내구도가 깎이는데, 30%쯤이라도 되찾으려고 시체를 찾으러 갔다가 또 맞아죽는 악순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시스템에 대한 안내가 게임 내에 전혀 없어서 유저들이 알아서 커뮤니티를 뒤져서 정보를 공유해야 했고, 이름난 유저가 노는 커뮤니티는 텃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게임은 그런 게 매력이기도 했다. 렙업장소가 따로 정해진 게 아니라서 언제나 귓말로 찾아오는 길을 설명하며 한두시간 기다리기 일쑤고, 부활 좀 해달라고 우는 귓말이 오면 그날 렙업 제치고 산 속 골짜기를 찾아가서 사람하나 살리고는 뭔지 모를 귀금속 아이템 하나 받고 감사감사 연발하며 마을에 주저앉아 수다를 떨었다. 난 캐나다 사는 고딩인데 우리 마을 남자애들은 다 이거 해. 우린 몬트리올 사는 50대 부부인데 렙업보다 낚시가 더 좋아. 전쟁지역에 나가봤는데 우와 눈에 보이지 않는 누가 날 한방에 죽이고 /경례 했어! 지금도 난 다옥 게임 내에서 BGM 없이 강가에 앉아 올려다보던 하늘을 기억한다. 무제한 pvp가 가능한 이벤트 서버에서 엘리트 길드들에 밟히고 피곤해 하면서도 그 나름대로 즐거웠다. (맞아 죽은 상태에서 채팅으로 길드간 교섭을 하던 경험이 내 영어의 기초를 이룸..)

한국 서버가 열렸다. 외국 친구들과 한국 서버에서 길드를 만들어 놀며 다양한 인간군상을 경험했다. 우리 사이에 끼어 승리포인트를 챙기며(이걸로만 배우는 특수스킬이 있었다) 뒤에서는 우리 길드를 모함하던 사람들, 여자인 척 연기를 하며 여자길드원들의 비밀을 캐어 소문내던 사람, 길드에는 도움이 안되면서 바라는 아이템만 많아서 천하에 못쓸 길드라고 외부에 간증을 하고 다니는 40대 아저씨, 최고의 실력을 가졌지만 냉정하게 자기중심적으로 플레이하던 중딩...(나중에 알았음) MMORPG는 현실사회를 그대로 반영하고, 어떤 사람들이 더 게임에 시간을 투자하느냐에 따라 문화가 달라진다.


(WOW 시절의 길드 정책 일부. 본문에 나오는 오피서 중 Order가 내 닉네임)


MMORPG를 접은 지 오래 되었다. 체력과 근성의 결핍으로 꾸준히 접속이 힘든 데다,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다는 게 더욱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했다. 게임 내의 시스템만 볼 게 아니라 게임 바깥의 삶에 대해서도 살펴야 한다. 내가 다옥과 와우를 하던 시절은 좋은 팀원만 있으면 하루 다섯 시간씩 접속을 해서 게임 내에서 먹고살만 했다. 패키지를 사면 더 돈쓸 일이 없었고, 그래도 영어채팅 씩이나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대다수여서 입장이 다르더라도 말이 안통하지는 않았다. 게임을 즐기는 인구 자체가 많지 않아서 기본적으로 동류의식이 있었고, 내가 모르면 안알려준 놈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공부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스킬트리를 짜면서 실험결과를 올리는 사람의 이름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감사했으며,(보따리를 들고 다니던 내 루리킨도 다른 사람들보다 저렴하고 성능 좋게 장비 인챈트를 해 줘서 전장에선 보이지도 않았지만 수도에선 나름 인기있었다) 한번씩 오프모임을 하면 게임방 폐인 보다는 학교 직업 멀쩡한 사람들이 많았다. 온라인 게임은 약간 특수하지만 존중받을만한, 아무나 즐기기 힘든 취미생활이었다.

이렇게 예전 게임을 길게 소개한 이유는, 내가 경험한 다옥에 비해 검은사막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로 그 부분이 결정적인 패착이다.

게임은 더이상 공부의 대상이 아니다. 최고최대의 인원이자 문화의 생산자이며 돈도 비교적 잘 쓰는 초딩은 새로운 게임을 접속하자마자 공개채팅창에 "뭐가 제일 세요? 가르쳐주세요 제발요"라고 도배를 한다. 게임 내 부분 유료화가 대세를 이룬 다음에는 더더욱 심하다. 모범답안이 아닌 선택을 위해 돈을 쓰고 난 다음에는 책임질 놈을 찾게 마련이다. 돈으로 지름길을 택할 수 없대도 마찬가지의 분노를 얻는다. 바야흐로 소셜미디어의 시대, 골수팬 100명이 울트라안티 1명을 당할 수 없다. 시간 많은 놈이 이기는 싸움이고, 그런 면에서는 초딩이 세상의 주인이다. 검은 사막은 좋게 말해 때를 잘못 잡았고, 나쁘게 말해 기획이 오만(마치 88만원 세대를 꾸짖는 베트남 참전용사와 같은)했다. 게임도 결국 여가생활일 뿐, 본래의 삶과 유리될 순 없다.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 할일이 많은 사람은 게임을 안할 확률이 높다. 아름다운 금불상을 조각해서 저자거리에 널어놓은 꼴이다.



(다옥 한국1섭 발더 유저 Avril Lavign이 제작한 홍보영상. 참 열심히 하긴 했었다)

아무래도 한국이든 세계든, 초거대작 MMORPG의 시대는 저물었다고 봐야 한다. 시대를 뛰어넘어 D&D를 벗어난 뭔가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할 때까지, 나도 게임에 손 댈 일은 없을 듯 하다. 현실에서 이미 선택받은 자 외에 Role이 주어지지 않고, 가상현실에서 잘나가려면 돈이든 시간이든 현실에서도 잘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사람들은 몸으로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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